교과서 덮고 감성을 열다… 수능 이후 고3 교실 ‘특기수업’

김지원 기자

선배·친구가 ‘교사’ 돼 미술·네일아트 등 강좌… 모두 적극 참여해 수업 공백 우려 날려

“재료는 다 챙겨오셨죠? 그럼 각자 그리고 싶은 걸 자유롭게 그려보세요.”

지난해 11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후 오전 수업이 시작된 경기 오산시 운암고의 3학년 8반 교실. 적막함 속에서 학생들은 이내 제각기 도화지를 펼쳐놓고 아크릴 물감, 연필, 볼펜 등 미술용구를 놀리는 손이 바빠졌다. 수능 후 ‘카오스(혼란기)’라고 불릴 만큼 사실상 거의 수업이 진행되지 않는 고3 교실 문제는 해마다 반복돼왔다. 하지만 운암고 3학년 교실의 풍경은 달랐다. ‘학생이 가르치는 수업’ 프로그램 때문이다.

경기도교육청은 11일 수능 후의 고3 기간을 잘 활용하자는 뜻을 담은 자료집을 발간했다. 일선 학교에도 배포할 책 이름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이후 고등학교 3학년 교육과정 운영 길라잡이>로 정했다. 자료집에는 교육청과 일선 학교 교사들이 수능이 끝난 뒤 직접 고3 학생들에게 적용·활용할 수 있는 교과연계형 현장체험학습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담겼다. 정해진 수업시수 내에서 교육과정 편제를 조절해 3학년 2학기 이수단위를 감축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방안이 함께 제시됐다. 수능을 끝낸 고3 학생의 ‘수업 공백’ 고민이 커지고 있는 학교에서 올해부터 미리 참작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난해 수능시험 후 경기 운암고 3학년 교실에서 진행된 ‘특기수업’ 중에 한 학생이 얼굴 그림 그리는 방법을 강의하고 있다. | 운암고 제공

지난해 수능시험 후 경기 운암고 3학년 교실에서 진행된 ‘특기수업’ 중에 한 학생이 얼굴 그림 그리는 방법을 강의하고 있다. | 운암고 제공

올해 자료집에는 운암고가 소개됐다. 이 학교는 수능이 끝난 지난해 11월25일부터 29일까지 오전 3~4교시에 특기를 지닌 고3 학생들이 직접 동료 학생들을 상대로 진행하는 특기 수업을 했다. 피오피(손글씨), 네일아트, 헤어 연출, 배드민턴, 미술, 축구, 비보이 등 10여개의 강좌가 열렸다. 고교 3학년 학생 300여명은 모두 관심 있는 강좌에 등록해 수업을 들었다.

각 분야에 자격증이 있거나 수시로 특기 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을 ‘학생 교사’로 초빙해 강좌를 꾸렸지만, 직접 졸업반 학생들이 자원해 꾸린 강좌도 있다. 미술반의 경우가 그랬다. ‘학생이 가르치는 수업’이라는 학교 공지사항을 보고 미술 분야를 꿈꾸는 친구와 함께 자원해 강좌를 꾸린 박경서양(19)은 “가르치는 경험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보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강좌는 틀을 짜고 수업을 하는 것 모두 ‘학생 교사’가 자율적으로 정하고 있다. 특기수업마다 담당교사가 참관하긴 하지만 수업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박양은 미술수업 커리큘럼을 꾸려 미술 선생님에게 제출했다. 자유롭게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시간도 짰고, 나무거울을 아크릴 물감이나 찰흙으로 꾸미는 시간도 잡았고, 투시·원근법 등 미술의 기본 개념을 되새기고 설명하는 강의도 넣었다. 수업을 받는 학생이 학생 교사와 투시에 대해 문답하다가 아이디어가 모아져 마지막 수업 시간에 ‘미래에 자기가 일하고 싶은 꿈의 사무실’ 도면을 그리기도 했다.

박양은 “아무래도 학생이다보니 전문지식이 부족했지만, 그만큼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니 학생들이 더 잘 귀기울여 들어줘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며 “관심사가 같은 학생들이 자원해서 모인 수업에 다들 주체적으로 임했다”고 말했다.

운암고 민현진 교사는 “처음에 특기수업을 마련할 때 큰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아이들이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해 놀라웠다”며 “메이크업 수업에서는 강사 역할을 맡은 학생이 칠판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열심히 이론 설명을 하는 것을 보며 아이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남양주시 마석고의 고3 학생들은 수능이 끝난 후 스스로 졸업식에 상영될 영상을 만들었다. 영상 촬영·편집 등은 영상 분야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 맡았지만, 만들고 싶은 영상의 기본 콘셉트·주제는 학급회의에서 논의 끝에 결정됐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들은 그대로 영상으로 옮겨졌다. 각자 ‘1인 인터뷰어’가 돼 선생님이나 친구들을 인터뷰했고 그 주제도 다양했다.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 ‘내가 보는 친구의 모습’….

한 반에서는 ‘고3의 하루 일상’을 영상에 기록했다. 아침에 교문에 들어서서 수업 받고 친구들과 하루를 지내고 하교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담았다. 아이들끼리 수다 떨거나 선생님 몰래 장난치는 모습도 그대로 영상에 담겼다.

마석고 강현석 교사는 “선생님들이 미처 몰랐던 아이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의미가 컸다”며 “일반적으로 고3 수능이 끝난 후의 시간은 학교에서 보람 있게 보내기 힘든데, 이런 기회를 만듦으로써 아이들에게도 좋은 추억이 된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를 많이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부천 상원고에서 내놓은 ‘직장생활 길라잡이를 통한 노동교육’ 프로그램도 눈길을 끌었다. 고3 학생들이 수시에 합격하거나 수능을 본 뒤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는 것을 착안해 올바른 노동조건하에 노동할 권리, 경제 계획 등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을 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근로계획서를 직접 작성하고, 최저임금을 알아보고, 최저임금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꼽아보며, 직장인의 예절교육 등도 강좌에 담겼다. 정작 수업 일정이 맞지 않아 기획단계에서 멈췄지만, 학교에선 올해 고3 학생부터 해보기로 했다. 이 프로그램을 제안한 상원고 김영찬 교사는 “많은 학생들은 고3이 끝나는 순간 대학생이 되는 동시에 ‘알바’ 근로자가 된다. 이에 필요한 지식을 미리 알려주는 것은 의미가 있다”며 “올해 고3 학생들을 위해 미리 여러 강좌와 프로그램을 준비해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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